섭리적 행복

오래전부터 인류는 행복에 관해 정의를 내려왔고 역사가 바뀔 때마다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찾아 그것을 제시해 왔다. 그 어떤 이상과
비전도 행복에 이르러야 한다는 요건을 생략하고는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인류에게 행복은
가장 높은 차원의 가치였다.

흔히 말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는 삶에 대한 보편적 의문이다.
이는 ‘어떠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라는 인간 생의 가치 척도에
대한 고뇌의 산물이자 행복의 현실적・구체적・실질적인 방법론을 찾고자
하는 인류의 화두였다. 이러한 질문이 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지상 인류가 그토록 긴 시간
고뇌하고 추구했음에도 ‘행복’에 대한 절대적, 궁극적
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면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많은 이들이 부, 명예, 권력을 통해 행복을 좆아 살아왔고 그러한 삶은
지상의 주류적 가치관과 관점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삶이 유한함과 부, 명예, 권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부지불식간에
보편적 상식처럼 널리 통용되었기에
그와 같은 가치관과 관점은
행복에 관한 절대적, 궁극적 답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다른 한편에서는 부, 명예, 권력이라는 형이하학적이고 물질적인 답을 멀리하는 존재들이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행복의 진정한 개념・정의・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이상 세계의 궁극적 경지와 표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의견이 나누어지거나 객관성을 얻지 못하는 불안전함을 보였기에 그 또한 궁극적 답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상에서 물질과 정신은 둘 중에 하나만 정답인 대립항처럼 인식되어 왔지만, 모두 지상이라는 차원 안에서 존재하는 불안전한 대상이기에 어느 쪽을 추구하든 그 차원 안에서만 늘 맴돌 뿐, 둘 중 어느 한쪽에서 궁극적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류가 찾고자 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행복은 지상에서 말하는 물질과 정신의 차원을 뛰어넘어 정기신의 차원으로 상승・확장・발전한 빛의 세계를 체득・체험・체감했을 때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온전하고 완전한 세계에 이르러 온전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을 때 끊임없이 분화・변화・발전하는 지상 현실의 불완전한 답을 뛰어넘어 절대적이고 궁극적 답인 섭리적 가치관과 관점의 행복을 찾게 된다.

결국 섭리적 가치관과 관점에서 행복이란, 하나님이 태공을 열어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대단원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창조섭리의 목적과 목표, 방향성을 대전제로 하여 정리되는 개념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가치고 있고 충만하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충만하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그러한 세상을 열어 나가는 과정과 절차에서 느끼는 마음이 행복인 것이다.

따라서 섭리적 가치관과 관점에 입각하여 본다면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충만하고 조화롭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다른 것들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다. 어떤 것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집에서 살아가는가, 즉 지상적 가치관과 관점에서 생生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무엇을 더 가졌다, 덜 가졌다라고 하는 사실은 본本이 아니라 말末에 해당된다. 부차적이라 해서 나쁘거나 의미가 없거나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본질적 비중을 가진 것이 아닌, 지상의 삶을 용사用事하는 데 있어 보조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방식・방편에 해당하는 차선의 요소들이라는 뜻이다. 섭리적 행복을 위한 이러한 부차적 요소도 의미가 있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이 있다. 그래서 궁극의 행복을 찾는 존재들에게 있어 선후본말전도先後本末顚倒가 일어나면 섭리적 행복과 거리가 멀어져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섭리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섭리행으로 살아가고자 밝은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기쁘고 즐겁고 신명나고 환희심이 넘쳐 자비와 사랑, 배려가 일어나고 충만함과 고요함에 따른 만족감이 절로 차올라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마음이 샘솟듯 하면서 밝은 웃음과 함께 환한 미소가 끊이지 않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충만하고 조화롭고 아름다워 자신 스스로에게 자비, 사랑, 배려의 마음과 마음가짐을 일으켜 자신을 최고로 인정・존중・배려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위의 존재에게도 자비・사랑・배려의 마음과 마음가짐으로 인정・존중・배려하는 가운데 교류・공감・소통하게 되어 결국 같이 함께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신명나고 환희심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즉 궁극적 행복인 섭리적 행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섭리적 행복에 이르는 시작과 과정, 결과를 최대한 자연스럽고 효율적이 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천지인 섭리・율법・법도다. 많은 존재들이 각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위계와 질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개체들의 목적과 목표, 방향성이 충돌하는 가운데 위계와 질서, 관계가 흐트러져 원래 하나님이 모든 존재와 같이 함께 더불어 하고자 하는 밝고 맑고 찬란한 시작과 과정, 결과를 이룰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태공의 모든 존재들이 위계와 질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목적과 목표,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 섭리적 행복을 이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천지인 섭리・율법・법도다.

지상에서 위계와 질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형성된 법法과 같은 제도는 불완전하기에 어느 쪽으로 편향된 상태로 무리를 존속存續시키기도 하지만, 천상의 섭리・율법・법도에 의한 천지인 섭리・율법・법도는 기준원칙성, 군형형편성, 기회균등성, 과정절차성, 의식공유성, 등가비례성, 입체통합성, 희망긍정성, 변화발전성, 인정배려성, 체계논리성, 조화광명성을 통하여 나도 좋고 상대도 좋고 우리 모두가 같이 함께 더불어 좋은 트리플윈triple-win을 만든다.

그래서 천지인 섭리・율법・법도에 따른 행복이란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모두가 좋은 세상, 즉 천지인 섭리・율법・법도에 입각하여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충만하고 조화롭고 아름다워서 이해・수용・포용・관용과 아량으로 서로 교류・공감・소통하고 인정・존중・배려하여 같이 함께 더불어 하는 가운데 절로 충만함과 고요함이 일어나서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감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굳이 말로써 자비・사랑・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는, 하나님이 바라는 조화선국造化仙國이 만들어진다.

즉 천지인 섭리・율법・법도가 지향하여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곧 그러한 행복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운 곳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태공의 학교로서 지구에 만들고 싶어 하는 표본標本이자, 그 표본을 바탕으로 태공의 모든 행성으로 전파하고 싶어 하는 행복한 세상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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